시편 43편은 42편과 동일한 후렴구를 갖고 있지만(5절, 참고. 시 42:5, 11), 독립적인 시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다만 후렴구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같은 저자[=고라 자손]가 쓴 시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인은 세 가지 간구로 오늘 시편을 시작한다. 1) "나를 판단하시"고[=의혹을 풀어주시고], 2) 경건하지 않은 나라[=비신자들]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3)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 "나를 건"져달라고 시인은 간구한다(1절).
시인이 곤혹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분명 자신의 "힘"이 되시는 분이신데, 지금은 자기를 버린 것 같고,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2절). 그래서 시인은 다시 세 가지 간구를 주께 아뢴다. 1)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고, 2) "나를 인도하시고", 3) 주의 거룩한 산[=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또는 시온]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해달라고 간구한다(3절).
이제 시인의 결단이 이어진다. 시인은 자신의 "큰 기쁨"이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온 맘으로 주를 찬양하겠다고 고백한다(4절). 시인은 마지막으로 어제 시편에 등장한 동일한 후렴구로 오늘 본문을 마무리한다. 낙심과 불안의 현실 속에서 시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5절).
코로나19가 우리나라에 발발한 지 7개월이 넘어섰고, 2차 대유행의 기로에 선 지금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이 희생양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부 여당이 되었든, 야당이 되었든, 의료인이 되었든, 비신자가 되었든 상황은 비슷해 보인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 배후에는 자신은 의롭고, 다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은 타락 이래로 본질적으로 불의하다.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하던 시인의 노래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적용점을 시사해 준다. 첫째, 억울하고 불의한 상황을 만날 때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보다는 최고 법정인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내로남불식의 자기의에 사로잡힐 개연성이 높다. 따라서 시인처럼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
둘째,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빛이시고 진리이신 하나님의 인도가 절실한 때다. 지구촌에 코로나가 발생한 지 8개월 밖에 안 되었는데, 코로나 전문가가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실소가 나온다. 정작 고수들은 말을 아끼고, 보다 본질적이고 보다 실제적인 대안을 찾고 있다. 하지만 사람과 인공지능(AI)이 아무리 열심히 해법을 찾는다 한들, 전지하신 하나님께 비할 수 있을까?
셋째,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무질서(chaos)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cosmos)의 하나님이시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는 낙심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소망의 닻을 가장 신뢰할 만한 하나님께 내리고, 그분의 의로우심[=디카이오스]과 신실하심[=피스토스]에 근거하여 변함없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역대 최강풍을 동반한 태풍 '바비'가 올라온다는데, 춘천은 높고 파란 전형적인 가을 하늘을 뽐내고 있다. 바야흐로 여러 면에서 폭풍 전야다. 그러나 태풍의 눈에서는 평온한 것처럼, 주의 날개 아래서 평안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