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의 전통적인 기능은 그것이 갖고 있는 3가지 히브리어 이름인 베트 하테필라(기도하는 집), 베트 하크네세트(집회하는 집), 베트 하미드라시(학습하는 집)에 반영되어 있다. 회당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함께 모이다'라는 뜻의 synagei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집회 장소를 뜻한다. 오늘날 일부 개혁파와 보수파 회중들은 성전이란 말을 쓴다. 회당의 기원은 BC 3세기 이전이 틀림없지만 AD 70년 티투스가 제2성전을 파괴하자 회당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져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회당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므로 회당을 세우고 유지할 때 랍비와 직원들은 지역공동체의 요구들을 반영한다. 회당 건물에는 일정한 표준이 없다. 전형적인 회당에는 궤(율법 두루마리들을 보관한 상자), 궤 앞에서 타오르는 '영원한 빛', 즉 2개의 촛대, 교도들이 앉는 자리, 성서를 낭독하고 종종 사회자가 예배를 인도할 때 올라서는 조금 올라간 강단(bimah)이 있다.
신약 시대 유다교 회당은 유다인들 가운데 견고하게 확립된 기구이며 제도였다. 유다인들의 공공 집회 장소였던 회당은 지역 공동체의 종교적, 사회적 활동의 중심지였다. 그곳은 예배와 종교적인 모임을 위한 장소요 학교였으며 사법적인 절차를 집행하는 곳이기도 했다.1)
회당의 출현은 유다교 역사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회당은 종교의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냈다. 회당의 출현과 더불어 공적인 종교의식의 성격은 극적인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즉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으로서 그때까지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희생 제사가 기도와 종교적인 학습과 권고로 대체된 것이다. 공동체를 대표해 공적인 종교의식을 집행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제라는 작은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종교의식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처럼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바깥뜰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었으며 모두가 직접 종교의식을 이끌어 가는 주체로 참여하게 되었다. 게다가 회당은 성전처럼 어떤 한 특정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필요한 곳에는 어디든 생겨났을 정도로 보편적인 기구로 자리 매김하였다.
회당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바빌론 유배 무렵에 회당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는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거나 바빌론 등 각지에 흩어진 유다인들에게 믿음의 중심이 되었던 곳을 잃게 한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유배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자발적으로 모여 종교적인 의미의 모임을 가졌던 것이 회당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유배 기간 동안 성전 의식을 거행할 수 없었던 유다인들에게 회당은 성전을 대신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유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이후에도 회당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다인들은 축제 때마다 성전 의식에도 참석했고 지역에서 거행되었던 회당 의식에도 계속적으로 참여했다. 회당은 성전과 달리 유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느 지역이든 설립되어 있었다. 유다인 남자 10명 이상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지 회당이 세워진 것 같다.
회당이 생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종교적인 것으로서 성경을 가르치고 율법을 배우며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특별히 안식일은 공적인 예배를 올리도록 정해진 중요한 날이었다.2)안식일에 회당에서 이루어진 예식은 다섯 부분으로 나눠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유다인들의 신앙고백인 ‘쉐마 이스라엘’을 낭송했고3)이어서 기도를 바쳤다.
그러고는 성경 봉독과 해석과 설교 시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예배의 중심이었다. 모세오경을 읽었고 예언서의 일부를 해설해 들려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권고의 말씀이 주어졌다. 그러고 나서 설교가 행해졌는데 이때 초청을 받은 사람이 설교를 하기도 했다.4)그리고 사제의 축복으로 예배가 마무리되었다. 사제가 없는 경우에는 기도로 끝맺음 했다. 회당의 예배 형식은 그리스도교 종교의식에도 반영되었다.
지역 원로들이 회당을 전체적으로 감독했지만 회당의 직접적인 관리자는 회당장과 시중드는 이였던 것 같다.5)회당장이 맡은 책임은 회당 건물과 재산 그리고 예식에 관한 일6)을 총괄적으로 감독하거나 계획하는 것이었다.
시중드는 이의 특별한 직무는 회당의 시설과 성경 두루마리를 관리하고 예식 중에 성경 두루마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성경 읽기를 가르치거나 율법을 위반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인 채찍질을 집행하거나 안식일을 알리는 나팔을 부는 일을 했다. 회당 건물은 크기나 형태가 다양했지만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출입구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게 했다. 안에 있는 시설로는 성경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궤, 성경 봉독과 연설을 위한 단, 등잔, 예배자들이 앉는 의자 등이 있었다.
신약 시대 팔레스티나를 비롯하여 로마제국 전체에 퍼져 있던 회당은 그리스도교의 시작과 성장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설교자로서 회당에 자주 초청되었던 것 같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공적인 사명을 시작하신 후에 자주 회당에 가시어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아픈 이들을 고쳐 주셨다.7)그리스도교 초기에도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회당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고8)사도들과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회당을 거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9)회당에서는 유다인들뿐 아니라 유다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은 복음 선포를 위해 회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회당에 자주 드나들면서 보여 준 개방적인 친교의 모습은 유다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그들의 개방적인 태도로 인해 계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본질적으로 나타내는 유다교 의식의 순수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